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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분 읽기#life

스토너 — 실패의 일대기가 아닌 이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1965). 첫 문단에 주인공의 죽음이 나오는 이 소설을 — '조용한 실패의 일대기'로 읽는 것은 가장 흔한 오독이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8년 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박사 학위를 받고 바로 그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사망할 때까지 가르쳤다. 부교수 이상 진급한 적이 없으며, 그를 알았던 학생 몇 명을 빼면 그가 살아 있을 때나 죽고 나서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Stoner 첫 페이지

존 윌리엄스는 — 한 권의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대담한 형식적 선택 중 하나로 — 첫 문단에 모든 것을 알려준다. 주인공의 출생, 직업, 진급의 한계, 그리고 죽음. 남은 280페이지는 이미 일어난 일을 채우는 시간이다.

대부분의 독자가 이 책을 *"조용한 실패에 대한 슬픈 이야기"*로 읽는다. 2013년 유럽 재발견 당시 르 몽드는 *"the perfect novel"*이라 불렀고, 줄리언 반스는 *"a quiet, sad, beautiful book"*이라 했다. 둘 다 부분적으로 맞고, 핵심은 놓쳤다. 이 소설은 실패의 일대기가 아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삶 안에 살아 있는 한 가지 — 책에 대한 사랑 — 가 어떻게 한 사람을 구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첫 문단이라는 형식적 선택

소설의 첫 페이지에 결말을 다 적어 버리는 작가는 두 부류뿐이다 — 글쓰기를 모르는 작가, 또는 결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정확히 아는 작가.

윌리엄스는 후자다. 스토너의 죽음은 —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향해 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위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다. 줄거리의 긴장이 제거된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 한 사람의 일상이 어떻게 일정한 무게를 갖게 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형식이 작동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우리도 이미 우리의 결말을 안다. 우리는 죽는다. 스토너의 부고를 1페이지에서 읽는 것은 — 자신의 부고를 미리 읽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후의 모든 장면은 *"이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결국 남았는가"*를 묻는다.

농가 소년이 셰익스피어를 만난 그 한 순간

1장에서 윌리엄스는 한 장면에 책 전체의 뼈대를 박아 넣는다.

스토너는 미주리 농가의 외아들이고, 어머니의 손은 22살에 60대의 손이다. 그는 농학을 공부하러 대학에 왔다. 필수 교양으로 들은 영문학 개론 시간 — 늙은 교수 아처 슬론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을 읽고, 강의실 앞쪽에 앉은 스토너에게 묻는다.

"Mr. Shakespeare speaks to you across three hundred years, Mr. Stoner; do you hear him?"

스토너는 답하지 못한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표현할 언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아서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그는 — 자신이 다시는 농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안다.

이것이 이 책의 *"give it most fully when he was unaware of his giving"*의 첫 번째 순간이다. 의식적 결정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그를 통과해 갔고, 그는 그 후로 그것을 평생 받든다.

윌리엄스의 천재성은 — 이 장면을 회상으로 미루지 않고 1장에 박아 넣은 것이다. 책의 모든 비참한 사건 — 에디스의 결혼 파괴, 케이트와의 짧은 사랑, 학과장 로맥스의 음모, 딸 그레이스의 알코올 중독 — 은 이 한 순간이 만든 진로의 부산물로 읽힌다. 스토너는 셰익스피어를 들은 그 강의실에서 이미 자신의 결말을 받아들였다.

에디스 — 20세기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결혼

스토너의 결혼은 영문학에서 가장 황량한 결혼 중 하나다. 비교 가능한 것은 Middlemarch의 도로시아-카소봉, 또는 Revolutionary Road의 휠러 부부 정도.

에디스를 잔인하게 묘사하는 것이 윌리엄스의 목적은 아니다. 책을 두 번 읽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 에디스도 스토너만큼 갇혀 있다. 19세기 말 미주리 부르주아 가정에서 자라 "여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외에는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결혼을 통한 탈출이 결혼이 아니었음을 발견했을 때 — 그 분노가 향할 곳은 한 사람뿐이다.

에디스가 신혼 첫날부터 차곡차곡 행하는 일들 — 침실의 거부, 서재의 점령, 딸 그레이스를 무기화하는 방식 — 은 *"악녀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감금을 견딜 수 없는 한 인간이 가까이 있는 누군가에게 그 감금을 분배하는 방식이다. 윌리엄스는 한 번도 에디스를 변호하지 않지만, 한 번도 그녀를 단순한 악역으로 환원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이 "슬픈 책" 이상인 이유다. 윌리엄스는 — 결혼이라는 제도가 두 사람 모두를 파괴할 수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한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뒤바뀐다는 것을 — 한 발자국의 도덕적 판단도 없이 보여준다.

케이트 드리스콜 — 가장 짧은 그러나 가장 살아 있는 챕터

스토너가 40대 중반에 케이트와 갖는 짧은 관계는 — 책 전체에서 유일하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다.

윌리엄스가 이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 그가 작가로서 얼마나 자신을 통제하는지를 보여준다. 흔한 학내 불륜 소설(Lucky Jim, Pnin 계열)이라면 풍자 또는 비극으로 갔을 자리에서, 윌리엄스는 —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시간이 어떻게 다르게 흐르는가만을 묘사한다.

"그는 그 두 달 동안 자신이 늘 아내가 줄 거라 믿었던 모든 것을, 그리고 알지 못했던 모든 것을 케이트에게서 받았다."

윌리엄스는 이 관계의 끝을 비극화하지 않는다. 학과 정치가 케이트를 떠나게 만들고,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스토너는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자신의 강의실로, 자신의 서재로 돌아간다. 그러나 — 이 두 달은 이후의 모든 페이지에 자국을 남긴다. 케이트가 떠난 뒤 스토너의 강의는 동료들이 알아챌 만큼 깊어진다.

윌리엄스는 한 번의 행복이 한 사람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 행복 자체가 아니라 행복 이후의 일상의 밀도로 측정한다.

로맥스의 음모 — 학내 정치의 가장 정확한 묘사

스토너가 학과의 도제생 워커를 학위 심사에서 떨어뜨리는 장면 — 이 책의 도덕적 핵이다.

워커는 영리하지만 부정직하다. 자신의 빈약한 학식을 수사로 가리고, 한 번도 텍스트를 정직하게 읽지 않는다. 학과장 로맥스는 — 다른 이유로 — 워커를 통과시키려 한다. 스토너는 거부한다. 한 번. 두 번. 위협 앞에서도. 그 결정의 대가로 그는 남은 경력 전체를 — 1학년 작문 강의만 배정받는 — 학과장의 보복 속에서 마감한다.

이 장면이 강력한 이유는 — 스토너의 거부가 *"영웅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 부정직한 박사 논문을 통과시킬 수 없는 사람이고, 그것이 자신의 평생을 망가뜨릴 것을 알면서도 통과시킬 수 없다.

이것이 윌리엄스가 *"평범한 삶"*에서 도덕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도덕은 결심의 순간이 아니라 — 결심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일관성이다. 스토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이 아닌지는 정확히 안다.

윌리엄스의 산문 — 투명함이라는 어려운 기술

이 책의 산문은 — 한 번 읽으면 *"평범하다"*고 느낀다. 두 번째 읽으면 — 그 평범함이 얼마나 정교하게 깎여 있는지가 보인다.

윌리엄스는 메타포를 거의 쓰지 않는다. 형용사를 두 개 쓰는 일이 거의 없다. 부사는 더 적다. 헤밍웨이의 격언적 짧음과는 다르다 — 헤밍웨이는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지로 글을 쓰지만, 윌리엄스는 무엇을 천천히 드러내는지로 쓴다.

"He had, in odd ways, given it to every moment of his life, and had perhaps given it most fully when he was unaware of his giving."

이 문장은 책의 마지막 30페이지에 나온다. 일찍 읽으면 의미가 없다. 280페이지의 일상이 쌓인 뒤에야 — 이 문장이 기둥처럼 책 전체를 받친다.

윌리엄스는 *"느낌"*을 쓰지 않는다. 그는 — 느낌이 일어난 후의 행동의 작은 변화만을 쓴다. 스토너가 케이트의 떠남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윌리엄스는 슬픔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스토너가 강의 노트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것만 쓴다. 슬픔은 독자가 떠맡는다.

2013년 재발견 — 그리고 오독

이 책은 1965년에 거의 팔리지 않았고, 2003년 NYRB Classics 재출간 후 천천히 살아났다. 결정적 순간은 2013년 — 프랑스에서 *"올해의 책"*이 되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

이 재발견 과정에서 가장 흔한 오독이 자리 잡았다 — "실패한 삶도 의미 있다는 위로의 책". 이것은 책이 위로하지 않기 때문에 위로의 책이 되는, 자기소비적 독해다.

스토너는 *"실패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 자신이 사랑한 한 가지(문학)를 평생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진급에 실패하고, 결혼에 실패하고, 부모로서 실패했지만 — 그 한 가지 일관성이 그의 삶을 실패에서 구원한다. 책의 마지막 장면, 죽어가는 스토너가 자신의 첫 책을 손에 쥐는 그 순간 — 윌리엄스가 보여주는 것은 *"그래도 의미는 있었다"*가 아니라 그가 평생 들고 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확인이다.

결론 — 이 책이 진짜로 묻는 것

『스토너』가 위대한 책인 이유는 — 한 가지 질문을 한 번도 명시적으로 묻지 않으면서, 280페이지 동안 그 질문을 독자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평생 배신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는가.

스토너에게 그것은 셰익스피어 소네트 73을 들은 그 강의실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결혼도, 부모됨도, 사랑도, 직업적 진급도 — 그 한 가지에 비하면 부수적이었다. 윌리엄스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을 끝까지 따라가며 — 그 한 가지가 어떻게 한 사람을 받쳤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대부분의 위대한 소설은 *"인생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스토너』는 더 어려운 질문을 묻는다 — "당신이 평생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죽기 전에 알 수 있겠는가."

읽고 나면 — 책장을 덮고도 한참, 자신의 강의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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